당신은 멸망하지 않는다 -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잡설영역


사이버네틱스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은 자연에 더 가까운 존재일 수 밖에 없다. 뼈과 근육, 내장과 기관, 그 사잇속을 흐르는 액과 신호다발들, 그리고 이 모든 걸 통제해나가는 두뇌 모두 생물학적인 유전적 설계과정에서 탄생한 구조물이니까. 그래서인지 우리의 직관은 자연과 환경이라는 존재에 대해 언제나 절대적인 긍정을 보낸다. 


이같은 긍정이 나쁜 건 아니다. 우린 자연에서 살며 환경에 영향을 받는 생물이니 그것에 대해 경외와 연민을 갖는 건 당연한 이치이며, 반드시 필요한 시선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의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다. 이는 저자인 마이크 셸렌버그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30여년 간 환경운동에 매진해왔고, 현대 환경운동이 가지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두루두루 경험해 온 자니만큼 더더욱일 터다. 책이 제기하는 의의는 환경에 대한 의식과 관심이 아니다. 그것을 생각하는 이들, 우리 모두가 가진 직관이 가지는 함정을 파헤친다는 점이다. 


직관이란 기본적으로 흐름의 법칙을 따른다. 물이 이상적인 장소를 향해 흐르듯이, 우리의 생각은 흐름이 방해받지 않는 최적의 경로를 따라 움직이려는 본능이 있다. 그것은 효율적인 사고를 가능케 하고 필요없는 에너지 소모를 줄여 인류의 지성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우리를 명석하게 만들어 주는 직관이라는 것은, 과학의 영역에 들어서면 골치아픈 문제로 변한다. 자연이 보여주는 현상들은 우리의 직관적 편리와는 상관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명제를 우리가 깨달은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수많은 과학자들은 그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성공했지만, 아직 전 인류의 보편적인 사고에 이것이 장착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자연선택설이 진리로 자리잡은 현재도 ‘진화’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우리의 직관은 여전히 동식물이 포켓몬이나 디지몬마냥 며칠밤 자고나면 없던 눈이 생기고 있던 꼬리가 사라지는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다. 물론 직관을 잘 조율하며 사실을 탐구하다보면 누구나 못 이해할 거 없는 이야기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었으면 이런 지구에 이런 생물종이 이런 생각을 하며 자라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각종 환경 문제들에 있어서도 같은 괴리가 생겨난다. ‘환경이 파괴되고 있다.’라는 화두를 들은 우리의 직관은 재빠르게 상황을 인식하고 해답을 찾는다. 이 과정에서 외부의 정보, 이를테면 다큐멘터리나 뉴스 등을 찾아보며 인식의 궁전을 지어나간다. 그리고 해답의 과정에 들어설때, 자신이 모은 문제에 대한 ‘반대’의 요소를 도출해낸다. 공장에서 올라오는 매연이 대기를 파괴한다고 하면 공장을 폐쇄해버리고, 발전소에서 나오는 탄소가 지구온난화를 가속한다고 하면 발전소를 폐쇄하고 친환경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답을 도출한다. 아주 직관적인 반응이자, 어찌보면 당연한 해답이다. 솔직히 뭘 더 생각해야 할지도 모를 시원한 답변이다. 사실 이 이상의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은 먹고살기 바쁜 모두에게 사치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직관이 가지는 흐름 속, 먹고살기 위해선 에너지를 비축해야 하기에 그 이상을 성찰하기 힘든 개인이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인식의 골짜기를 교묘하게 파고든 이들. 저자는 이들을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라 지칭한다. 이들은 직관과 진실간에 벌어지는 간극 사이로 슬쩍 들어와 자신들의 주장으로 만든 다리를 놓는다. 물론 이 주장은 꽤나 직관적이다. 적당히 직관적이면서 여러 신뢰성을 든든히 두른 이 주장에 더는 알아내기 싫은, 아니 알고는 싶은데 굳이 나서기는 싫은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물론 단순히 설득만 한다면 그것이 편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남은 공간에 도덕적 요소를 집어넣는다. 이 주장에 동참함으로서 당신은 정의로운 시민, 혹은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으며, 당신 주변의 평범한 타인들을 아래에 둘 수 있는 고고한 사상가가 될 수 있다고 속삭인다. 지구를 살린다는 대의를 따르는 것도 모자라 공허했던 개인의 마음까지 채워주는 이 속삭임을 마다할 이들은 썩 많지 많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수많은 운동가들의 입을 빌어 선진국의 탄소배출량을 규탄하고 머지 않을 시기에 올 생물종 멸종과 기후 재앙을 손꼽으며 기다리는 존재가 되었다.


마음을 가진 것은 좋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선의로 빚어진 지옥으로의 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상술했던 진화에 대한 우리 직관과 달리 생물종은 우연으로 생긴 돌연변이의 죽음과 생존이라는 냉혹한 질서 속에 돌아가지만, 우리는 이것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불편해서다. 직관에 몸을 맡겨 깔끔하게 떨어지는 의식적 결론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썩 도덕적이지 않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적응하지 못하면 모두 죽는다는 자연선택의 대명제는 평범한 우리에게 보이기엔 너무 잔혹하고 비인간적으로 보인다. 그런 우리에게, 자연은 이렇게 답한다. ‘어쩌라고?’

직관이 가진 효율성은 인정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더욱 효율적인 감옥이 될 수 있다. 직면한 문제가 자신의 문제라면야 모르겠는데, 그것이 세상의 문제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누누히 말하지만 세상은 나와 당신과 기타 개별 존재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기에, 우리의 직관과 상관없는 진심을 무심하게 던져놓고 사라지니까 말이다. 


저자의 의견은 어찌 보면 파격적이다. ‘자연을 지키려면 더더욱 개발해야한다.’, ‘원자력은 완전한 친환경 에너지이다.’, ‘환경운동가들이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등, 언제나 열혈이 넘치는 운동가들을 발끈하게 하기 충분한 사안들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이 집단으로 쏟아내는 환경문제의 적신호를 부정하지 않는다. 누구들처럼 지구온난화가 허구라고 하지도 않으며, 바다생물들이 플라스틱을 먹고 죽어간다는 사실에 함께 분개한다. 그 시점 자체는 같다. 하지만 관점은 다르다. 저자의 관점은 단순 직관의 일자형 흐름 밖에서 좀 더 세분화된 이치를 찾아낸다. 그것이 부르는 부작용을 인정하되, 그것이 가져다 준 인간과 자연간의 평화협정이 지금까지의 환경 보호에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를 역설한다. 저자는 콩고를 위시한 저개발지역의 열악한 생활상을 이야기하며, 저개발 국가의 국민들이 열악함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살아남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만성적 부족은 결국 생존을 위한 자연영역을 뜯어내 에너지로 소모해버리고,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없는 자연에너지를 금방 고갈시킨 뒤 다른 영역을 황폐화하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그들의 삶은, 전기와 수도로 대표되는 고에너지 인프라를 영위하는 선진국 국민들이 자신도 모르게 수행중인 환경보호 활동을 역으로 각인시킨다.


인공적이기에, 화학적이기에 비환경적인 것 처럼 보였던 수많은 고에너지 집약의 산물들은 인류가 자연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고 자연의 수많은 존재들을 보호해주었다. 지금 이 순간 거북이들이 플라스틱을 먹고 죽고 있기에 플라스틱을 없애자 주장하기 이전에, 바로 그 사악한 고형 물질이 발명됨으로서 상아와 등껍질을 뜯기며 살았던 코끼리와 거북이들이 더 이상 사냥당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라 말하고, 최근 잦아지는 것 ‘처럼’ 보이는 산불들이 횟수면에서는 별 다른 상승세가 보이지 않는다는 과학적 분석을 곁들여 최근 산불이 커지고 피해가 늘어난 것은 인간의 거주구역이 넓어짐과 동시에 과거보다 훨씬 울창해진 산림으로 인한 발화연료의 증가가 크게 작용한다는 과학자의 분석을 내놓는다. 고에너지의 힘을 빌어 집약적으로 변해가는 인류의 생활반경의 틈새에서 많은 산림들이 복원되고 있다는 하나의 신호로 받아들여본다면, ‘재앙’이라는 단순한 인식 바깥의 어느 영역을 탐구할수 있는 시야가 펼쳐진다. 


이밖에도 저자는 여러 토픽을 차례차례 열거하고 각종 논문과 사설 등을 참조하며 직관 의존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종말론적 환경운동이 어떤 식으로 환경보호를 방해하는지 조목조목 설명한다. 친환경 발전이라 믿었던 태양광과 풍력발전이 수많은 동식물을 죽이고, 개발도상국에 댐과 발전소를 짓지 못하게 방해함으로서 보존해야 마땅한 자연의 영역을 파괴하고 있다. 매우 강력한 친환경 에너지 생산수단인 원자력은 대중의 공포를 이용한 환경운동가들의 목소리를 타고 대중과 제도권에 핍박받고 있으며, 심지어 그 이면에서 거대 화석연료 기업체들의 자금이 수많은 환경단체들의 목소리를 조종하고 있음을 일갈한다. 

언뜻 보면 개별적인 이슈 하나하나를 이야기하는 것 처럼 보이는 이 주장의 면면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직관에 반하는 해결책이다. ‘a하니 b를 한다’는 지극히 일자적인 사고가 우리들이 원하는 목표를 이뤄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a를 위하여 d나 f를, 아니 역으로 a 자체를 더더욱 고려해야 한다는 흐름의 주장이 꾸준히 이어진다. 더 이상 자신의 의식적 만족을 위한 보여주기식 깨어있기가 아닌, 좀 더 깊고 본질적인 목적을 향하는 시선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시선이 녹아들어있다. 


사실 저자가 환경운동가라 그렇지, 설령 다른 분야의 이야기를 펼치더라도 이 같은 관점은 공통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직관의 감옥에서 벗어나 진정한 목표를 인지하고 실행함은 이과고 문과고를 떠나 살아감에 있어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일 터다. 그렇기에 저자의 글에서 느껴지는 어떤 것은 비단 환경학에 국한되지만은 않는다. 책에 게시된 토픽들은 하나같이 현재 주류 환경론과는 무척이나 대립하고 있고, 그렇기에 어딘가의 누군가의 손으로 훨씬 정교하게 짜여진 반박이 나올 지도 모르며, 이 책을 읽고 에코 휴머니즘에 입단한 이들의 지금을 인생의 흑역사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보여준 통찰의 방식과 정교한 문제 해결만큼은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그레타 툰베리를 비롯한 운동가들이 눈으로 보이는 퍼포먼스에 많은 시간과 돈, 그리고 탄소를 허공에 날리고 있을 때 깊은 통찰의 영역을 위해 조용히 의식의 궁전을 종이 위에 직조해낸 저자의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에 경의와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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