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림을 못 그린다. 애초에 관심도 딱히 없었기에 내 입으로 흙손 똥손 이야기하는 것도 자유롭다. 그런 탓에, 쓰잘데기없는 국문과 근성 탓에 뭐든 작가론적 입장에서 보곤 하는 내가 유일하게 온전히 독자의 입장으로 순수히 즐기는 게 만화다. 결국 ‘텔링(telling)’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내 지식체계에, 펜대로 이루어진 ‘쇼잉(showing)’의 영역은 너무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만화는 너무나 편안하게, 그리고 작가와 독자라는 거리감을 강하게 느끼며 보는 몇 안되는 컨텐츠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기에 부럽기도 하다. 내가 인생에 한 번이나 써 볼 청산유수의 문장을 그어놓아도, 그들의 펜대에 쥐어진 약간의 곡선 하나만큼 나를 표현할 수 있을까. ‘문체’와 ‘그림체’는 충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개개인의 스타일이겠지만 그걸 표현하기 위해 벌여야 하는 작업의 깊이는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조금은 든다. 물론 만알못 똥손의 말이니만큼 신뢰도는 바닥이겠으나, 너무도 자연스레 앉아있는 심정적 부러움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문체가 완성되기 위해 존재할 무형의 것들이 그림에 있어선 그저 ‘기술’로 치환되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래서, 개인적으로 만화란 개별 창작 영역 중 가장 접근성이 높으면서, 동시에 노력 대비 명성을 빨리 뽑아낼 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의 난이도는 당연히 높겠지만, 기술적인 역량만 받쳐준다면 같은 수준의 글보다 많은 결과값을 얻어낼 수 있다. 잘 ‘보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방해요인이었을 적절한 자기 PR 공간의 부재는 이제 원숙하다 못해 쉬어터지기 시작하는 인터넷 공간이 깔끔하게 해결해 주었고, 대충 1세대라 불러도 괜찮을 pc통신 세대들이 그네들 뛰놀라고 전용관까지 깔끔하게 마련해 주었다. 글 길이는 줄고 파일 로딩 속도는 빨라지는 요즘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이미지’가 되었고, 이를 가장 쉽게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금손끼를 마음껏 발산하는 일이 되었다. 그렇게 금손은 똥손들에게 추앙받고, 위로 올라선다. 유명인과 팬의 관계가 탄생한다.
이상한 건 아니다. 세상에 팬 없는 창작이 어디 있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무명이다못해 시작도 제대로 안한 작가들에게도 친구라는, 가족이라는 팬 정도는 있다. 여기까지라면 전혀 문제될 거 없는 사항이다. 문제는, 1인이 제작할 수 있는 컨텐츠 중에서 그림이 가지는 특징이다. 비슷한 궤를 타고 있는 웹소설을 봐도 그렇다. 대여점 양판소 시절부터 지금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대체 이게 소설인지 시나리오인지 모를 글들이 넘쳤고, 지금도 넘친다. 문장 길이로 꼰대질하려 하는 게 아니라, 글이 가지는 특징적 스타일은 시대의 흐름을 타고 극도로 단순화되고 접근성 역시 낮아졌다는 뜻이다. 그럴듯한 시나리오, 예컨대 다들 한 번은 보았을 양판소의 법칙들이 적절히 버무려진 덩어리 하나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나도 쓰겠다.’, ‘한 번 써볼까?’ 같은 생각하기 딱 좋게 생겼다. 쉽게 읽어낼 수 있는 컨텐츠의 시대를 맞이함에 있어, 만화가 그림의 퀄을 높여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면 소설은 아무나 써도 될 것 같은 스타일을 향해 움직였다는 뜻이다. 작가와 독자간의 영역이 허물어지는 시대에서, 소설은 더 쉬워졌고, 만화는 더 어려워졌다. 독자가 작가가 될 수 있는 영역의 차이가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에게 힘을 싣는 현상을 야기한다. ‘특권’이 탄생하는 셈이다.
거기에 앞서 말한, ‘개성을 만들기 쉽다’는 다른 현상을 낳는다. 소설과 달리 작가라는 존재를 좀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기반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양판소 작가가 책 수십 권을 시리즈 단위로 던져야 겨우 이름 석 자 드러낼 명성을 얻는다 하면, 만화가는 더 선명한 아이덴티티를 필두로 자기어필을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다. 현재 tv에 출연하는 만화가들이 미친놈처럼 작품을 찍어내던 사람이었던가. 공무원 대표 조석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선 그 육각턱 노란샤스의 사나이 하나만 던져놓으면 된다. 한 눈에 들어오는 캐릭터를 무기삼은 작가는 곧 편리하고 효과적인 아이덴티티를 얻고, 이는 작가 자신을 포장하는 원동력이 된다. 말하자면 ‘네임드’에 가까운 현상일 것이다.
이 것들을 이래저래 붙여보면, ‘특권을 가진 네임드’의 탄생이다. 그래. 요즘 말로 친목종자라 하는 그런 존재 말이다. 그 특권을 가진 네임드가, 특유의 시스템과 인맥 속에서 곯아터지는 순간, 우리가 보고 있는 해로운 짹짹거림으로 재탄생하여 공기를 더럽히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하다못해 이들이 먹고살기 힘들기라도 하면 그냥 우물 안 부심으로 남을 지 모르겠다만, 솔직히 그렇게 보이진 않는 것도 사실이다. 애초에 돈 주는 건 회사고, 걔중엔 풀타임 굴러서 200버는 것만으로 부족할 게 없는 열정꾸러미 풋내기도 많을 것이다. 거기에 요즘 무한도전에서 보이는 선배 작가들이 웹툰작가라는 직업계에 무제한의 뽕을 주입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부심이 잔뜩 주입된 특권주의자 네임드'다. 사고가 안나길 바라는 게 이상한 일이다.
결국 저 작가들, 그래 편의상 환쟁이라 부르고 싶은 그들이 왜 저러고 사는지는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고 싶다. 솔직히 작가나 작가지망생들, ‘나는 유능한데 독자들이 미개해서 이모양 이꼴이야.’ 같은 생각 안 해 본 사람 하나 있을까. 그것까진 알겠다. 좀 짜증날 순간 정도야 있을 수 있으니까. 솔직히 자기들의 데뷔작이나 출세작들이 온전히 자기가 만들고 싶은 작품이었을까. 다 ‘자기랑 달리 못 배우고 미개하신’ 독자들 입맛 맞춰 끼워 맞춰낸 거겠지.
당연하지만, 이건 사회복지사가 ‘우리 동네 기초생활수급자 여러분들 다 인성쓰레기 밑바닥인생 ㅇㅈ?’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관련 반응은 이 쯤 하도록 하겠다. 그저 나는, 승냥이 같은 것들이 감히를 연발하는 저 주제 모를 윗동네인식의 근원을 찾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외부적인 악재가 겹쳐 근 일 년 간 글을 쉬었지만, 한창 글을 쓸 적을 되돌아보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모를 순간을 마주하곤 한다. 뭐 ‘그 때 엄청 놀라운 생각을 해냈다!’ 같은 게 아니라, 이 없어 보이는 생각을 떠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배제해야 했으며, 얼마나 많은 외부를 차단해야 했을지에 대한 놀라움 정도가 맞을 것 같다. 나쁘게 말하면 ‘괴리’요, 좋게 말하면 ‘성찰’이라 할까. 겉멋으로만 썼던 성찰이란 단어가 얼마나 정신나간 짓거리인지를 알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글쟁이라는 인간의 성찰을 재가동시키려다보니 느껴지는 아득함을 애써 치우면서 보니, 웹툰 작가들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내 상식을 우습게 박살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3일간을 고민했었고, 두뇌 한 가운데 실낱같이 뽑힌 결론을 보며 비웃다가 납득한 거리를 찾아 긴 글을 쓰게 되었다. 사실 업계와 인간심리적인 분석은 많은 분들이 해 주셨기에 그 쪽을 보는 게 훨씬 이롭겠지만, 그냥 조금 더 근본적인 부분을 파 보고자 하는 발악 정도로 읽어주시면 좋겠다. 한 사람의 창작자로서, 여기까지 읽어주심에 감사드린다.
ps. 써놓고보니 어쩌다 금손 여러분들을 싸그리 모욕하는 글이 완성된 것 같은데, 이야기하고 싶던 것은 하나의 재료일 뿐 원인 그 자체가 아니라 말하고 싶음을 알려드리고 싶다. 나 역시 트위터발 오버워치 팬픽을 보며 즐거워하는 평범한 독자이고 독자였으니만큼 평범한 금손분들에 대해선 아무 증오도 없다. 오해될 여지가 보인다면 그냥 이 상한 인간이 글을 오지게 못 써서 그런 것이라 너그러이 넘겨주시면 감사하겠다.
ps2.일베가 한창 기승을 부렸을 적, 일베가 우파적 색채를 가지고 있어 더욱 털리는 것이라는 의견이 몇 개 보였는데, 최근 정의당의 행동을 보면 솔직히 맞아들어가는 것 같아 복잡해진다.
ps3. 웹툰 규제? 음...웹툰만 쏙 골라 규제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지 잘 모르기 때문에 패스하자.
ps4. 밸리 정하기 빡셌다. 밸리마다 이 얘기가 안나오는 것이 없다. 고심 끝에 만화 밸리를 선택했다.
덧글
독자들이 추종하는것이 당연한 것과 같다는 착각을 가지게 된 건 아닐런지 생각해봅니다.
물론 그걸 가지고 뭐라 할 순 없습니다. 그쪽이야 작가는 안그리면 그만이고, 팬들은 거기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니까요. 근데 웹툰쪽은 다르죠. 프로라는 타이틀 달고, 소규모의 폐쇄적인 커뮤니티가 아닌 불특정 다수의 일반 소비자 상대로 제대로 돈 받아가며 장사하려면 그래선 안되거든요.
지금 웹툰 사태 관련해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 하나가 '대체재'인데 마이너한 동인판이야 대체재 없는 본인들 독과점지만 웹툰 시장은 그렇지 않죠. 세상 어디나 철저하게 수요 공급 따라 가치가 갈리는 거고, 싼티나게 말하면 걍 후달리는 놈이 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판이 바뀌면 설 위치도 바뀌는 법인데 아직 현상 파악을 못한 사람이 많은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ps. 일베가 보수우파라 까인 건 아닌데 그쪽 스탠스라 '더' 까인 건 사실이라고 봅니다.
이렇게보니 제가 생각했던 '권력'의 구조를 더 잘 파악하신 것 같군요. 고견 감사드립니다:)
2. 그와는 별개로, 독자들을 우습게 아는 작가라는게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라고는 생각 하지 않습니다. 흔히 보이죠. 먹물과 함께 허영도 같이 먹은 소위 '지식인'들의 허세. 그런데 그런 지식인들은 대개 독자를 우습게 알 지언정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말아야 한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죠. 그게 최소한의 예의니까.
3. 내 글. 소중하죠. 그래요. 설령 남들이 보기엔 보잘것 없다고 해도, 그거 쓰는데 얼마나 고민했고 시간을 투자했는데. 나에게는 반쪽과도 같은 글이죠. 알아요. 하지만 글에 독자가 없으면 무슨 의미일까요? 자기 만족으로 글을 쓴다 쳐도 결국은 독자가 있어야 할텐데.
4. 창작도 결국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죠. 그것도 불특정 다수와의. 예의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는거고. 아마추어건 프로건 상관 없이, 그것만큼은 항상 숙지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2.사실 창작하는 사람이 독자 개돼지로 보는 감정 한 번 안 겪어봤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철 없던 시절 저도 제 소설이 독자들이 저열해서 인기가 없는 것이라 생각한 적도 있는 걸요. 서비스업종 종사자가 고객들을 무조건 좋게 생각할 이유는 없지만, 그것을 드러낸 순간 사표 쓰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일 뿐이지요.
3.제가 이글루스를 떠날 수 없는 이유가 누군가가 반드시 댓글을 달아주는 곳이란 인식이 있기 때문이지요. 말 나온 김에 자주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4.맞습니다. 영화도 시사회에서 좋은 평가 못 받으면 잘라내기 붙여넣기 시작하고 게임도 출시 후 그 몇 배나 되는 업데이트로 유저들의 기호를 맞추는데 만화나 소설이라고 안 그럴까요.
말씀하신 부분이 참 슬픈 게, 이런 당연한 이치를 무슨 거대한 인문학적 소용돌이를 다루는 것 마냥 진지하게 담론해야 한다는 점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