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은 목적이다. 잡설영역

꽤 전부터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다. 가뜩이나 후진 본판에 관리도 제대로 안 돼 좀 많이 처참한 몰골이었는데, 그대로 여자 많은 학과에 들어서다보니 본격적으로 열등감이 시작된 것 같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나는 콤플렉스에 잠식당해 보고, 튀어나와도 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았고, 동시에 외모에 대한 어떤 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뭐, 그리 살다보니 적어도 세간이 말하는 외모의 최소 기준인 '깔끔한 인상'은 됐다 생각하네만, 그런다고 타고난 외모를 감출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난 왜 이렇게 난장판일까였던 고민은 본판이 후진 이상 뭘 해도 안된다는 체념으로 바뀌었고, 어제의 유리천장보다 더 단단한 무언가가 되어 내 정수리를 후려쳤다. 외모 콤플렉스는, 온전히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저 다른 가면을 쓴 채 접근해왔을 뿐이었다.

그랬던 것 같다. 근 몇 년간, 변화에 성공한 나 자신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몇 년만에 만난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과거 사진을 본 후배들이 지금 화장하고 다니시는 거냐고 물어 볼 때 마다 난 내가 해냈다는 사실에 가슴 끓었다. 좋은 일이지. 이제 누구와 대적해도 지지 않을 나 자신을 획득했다는 사실이 내 눈 앞에 다가왔는데 좋지 않을 수가 없지.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여긴 순간 자존감은 배가 되고 또 다른 영역으로의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은 폭주가 되고, 더욱 당당한 어떤 것을 찾기 위해 나섰다. 그리고 예전 나를 침식했던 트리거를 다시 마주쳤다. 다시 찾아왔다.

맞다. 외형의 변화만으로는 자존감을 고칠 수 없다. 자존감 상실의 근원을 외적 요소에서만 찾는다는 건 자동차가 망가졌는데 더 비싸고 새로운 공구상자만 찾아 옥션을 뒤지는 행위나 다름 없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공구 없이 자동차를 수리하는 일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나사 하나 못 돌릴 녹슨 스패너로 낑낑대봤자 풀어지는 건 공구일 뿐이고, 잘못하면 엇나가 사용자를 다치게 만들 수도 있다. 원인에 대한 관리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자동차가 자가수복 능력을 가지려면 아직도 머나먼 기술의 발전이 있어야 할 테니, 남은 것은 스스로 바꿔나가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멋진 공구 상자가 있다고 해서, 자동차가 무조건 잘 굴러간다는 보장 역시 없다.
자동차는 마구 달려 목적지를 통과해야만 의미가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수단이다. 변화를 통해 자존감에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하고, 정신에 새로운 에너지를 삽입한다. 다시 한 번 움직일 수 있도록, 한층 더 올바르게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한 자존감 회복이 되기 위해선 결국 그 변화가 만든 목표지점을 통과해야 한다. 외모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잘생겨 졌다 하더라도, 그 잘생긴 얼굴을 통해 어떤 것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그 콤플렉스는 그대로인 것이다. 가령 겨우겨우 훈남이 되어 돌아왔는데 짝사랑하던 여자가 원빈급 미모의 남성과 사귀고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의 외모 콤플렉스가 된다. 번쩍번쩍한 공구들로 풀 세팅을 해 놓은 자동차가 어쩌다 생긴 작은 고장으로 도중에 정지해 버리는 꼴이다.

목적은 그렇기에 중요하다. 외모 콤플렉스니까 주구장창 외모만 가꾼다고 누수되는 다른 부분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외모에 대한 자존감이 낮고 그 자존감에서 콤플렉스가 유래한다면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마음에 드는 이성과 사귀지 못 했든, 얼굴 보는 면접관 앞에서 쪽을 당했든. 어찌보면 콤플렉스는 얼굴 자체가 아니라 얼굴과 연결지을 만한 어떤 '사건'이 주범인 이야기일 수 있다. 자신의 내외적인 어떤 것을 키우고 나니 엉뚱하게도 외모 콤플렉스가 극복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좋아하는 이성이 외모지상주의다? 그것마저 무너뜨릴 매력을 찾으면 된다. 면접관이 얼굴을 본다? 내 얼굴보다 이력서를 더 볼 수 있게 꽉꽉 채워주면 된다.
물론 어렵다. 솔직히 엄두도 안 날 작업인 거 안다. 내가 못하는데 남들에게 권하는 것도 웃긴다. 하지만 얼굴이 후져서 안돼라는 자괴감이나, 아무리 가꿔도 본판이라는 체념보다야 낫지 않은가? 자존감 저하의 원인을 좀 더 넓게 찾으면, 예상외의 방법이 보이고, 더 나아갈 길이 생긴다. 실현에 관해선 물음표겠지만, 가능성에 관한 한 무한대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고친 자동차가 제대로 고쳐졌는지는 달려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다 고쳤다고 환호 내지르는 거야 좋지만 차고에 박아놓고 완성된 자동차만 주구장창 보다보면 언젠가 놓친 어떤 것에 처참하게 망가지게 될 것이다. 자존감은 결과요, 목적이다. 스스로가 발전의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한다면, 힘차게 전진해 보자. 자존감을 지켜 낼 행복한 실체를 눈 앞에서 확인해 보자.

콤플렉스에 대해 고민하는 와중에 다른 글들을 보니 반가웠다. 조금은 반대될수도, 하지만 버릴 건 없는 두 글을 봄으로서 똥철학만 싸대던 내 머리가 겨우겨우 정신을 수습했다고 해야 하나. 겨우겨우 글 한 줄 쓸 만큼의 체계를 잡은 느낌이다. 타블렛이라 그런지 트랙백이 안되는데, 아무튼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근데 진짜 한줄짜리였나봐
글자들이 전부 똥으로 보여 으아아아아아

덧글

  • y91113 2014/07/27 04:20 # 답글

    아 .. 소름끼치는 글(좋게) ..
    감사합니다
  • 지나가던한량 2014/07/27 20:39 #

    소름이라니요. 너무 과분한 칭찬에 정신 놓을 뻔 했습니다 으아아아
  • 시안레비 2014/07/27 14:28 # 답글

    좋은글이네요 잘읽고갑니다
    전에 쓰신 군대글도 잘읽었습니다
    지금 군생활중인지라 더 공감이됬어요
  • 지나가던한량 2014/07/28 03:17 #

    아, 그래도 점호 준비 전까진 답을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현역께서 공감할 만한 내용이라니 저에게는 큰 칭찬이군요.
    힘내세요. 군대도 결코 마이너스만 존재하는 곳은 아닙니다
  • Graphite 2014/07/28 18:55 # 답글

    와 정말 잘 읽었습니다.
  • 지나가던한량 2014/07/29 11:35 #

    감사할 따름입니다.
  • 2014/08/12 12:4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8/12 15:1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한국산 종마 2014/08/15 21:20 # 답글

    저같은 경우도 외모 콤플렉스가 매우 심하고 또 촌스러워서 변하려고 노력중이긴 한데

    실제로 가장 중요한 건 직업이나 재산으로 인한 자부심과 자존심에서 오는 오오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머리로는 그걸 알고 있는데 자꾸 감정은 외모 콤플렉스로 간다는 게 제 문제입니다.
  • 지나가던한량 2014/08/16 11:09 #

    재력과 능력 없이도 아우라는 방출할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가 일반인 입장에서 맨땅에 헤딩이나 다름 없으니 그에 걸맞는 트리거로 기재를 발동시키는 것에 가깝겠지요. 말씀해주신 그런 것들은 어렵지언정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물건이니까 말입니다.
    외모콤플렉스로 가는 이유는...정신의 입장에선 편하니까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건의 원인을 '어쩔 수 없는 것'에 묶어둠으로서 노력의 한계라는 자존감 상실의 한 일면을 상쇄할 수 있으며, 동시에 외모지상주의로 대표되는 타인의 정서를 공격하는, 즉 '감정의 발산'이 한층 유리하다는 면도 있지요. 보기엔 좋지 않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잘 뜯어보면 정신 나름의 최선의 방어책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스스로 행동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될 만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 ㅈㄱㅅ 2016/09/06 03:23 # 삭제 답글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을정도로 , 흔히 렛미인에 나오는분들정도로 타고나게 외모가 조진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그러하죠.
    그사실 알고 부정하고 괴로위하고 3년이 지나고나서야 체념했습니다. 뭔짓을 해도안되요. 히키가 차라리 행복합니다. 아니 덜 불행합니다.
  • 어설픈 2016/09/06 03:28 # 삭제 답글

    어설프게 못생겼거나 그러면 괴로워하지도 않습니다. 답이 없으니 괴로운거죠. 티비에 나오는 박지선 오나미 정종철 이런분들 다 양반입니다. 그정도는 되야 못생겨서 괴롭다고 할 수 있죠.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것만 믿고 조용히 소극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풍기아줌마도 결국 시간이 고통을 덜어줬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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